사용자:Sotiale/Working/연습장/한국전쟁 이후의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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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인 체제[편집]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계, 국내파, 빨치산파 등의 여러 파벌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소련의 후원을 받은 빨치산파의 김일성은, 당시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을 거치면서 권력을 강화해갔고, 1950년경부터 반대파를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자, 남로당계를 포함한 국내파 제거에 착수했습니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김일성은 남로당계 인사를 체포하여 9명을 처형했습니다. 1955년엔 박헌영을 처형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미국 간첩이라는 죄를 씌어 처형했습니다.

8월 종파 사건[편집]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농업 협동화 정책 등의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연안파인 김두봉과 소련파인 박창옥 등은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농업 협동화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고, 탈스탈린화를 주장했었습니다. 당시 소련 공산당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김일성파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소련 공산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비판하듯 김일성의 개인 숭배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파는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반대파들이 권력구도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이는 김일성이 더욱 권력구도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갑산파 제거[편집]

북한은 김일성파의 반대 세력이 제거된 이후 주민들에 대해서 사상 검토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빨치산파가 북한 권력을 거의 독점하게 됩니다. 당시에 군부 강경파는 경제 건설을 우선시하는, 온건파에 속하는 갑산파가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하였고, 이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이 때가 1967년입니다. 군부 강경파는 남측에 여러 도발을 행했고, 주체 사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지목되었고, 김일성의 개인 숭배는 더욱 진전됩니다.

북한의 초기 경제[편집]

전쟁 이후 북한은 경제 복구에 노력합니다. 김일성은 반대파를 숙청하자 중공업을 우선하고, 농업 및 경공업 동시 발전 노선을 향합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의 3년간 계획은 경제를 전쟁 이전까지 복구하는데 거의 성공하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농장을 협동 농장으로 탈바꿈시키고, 1957년부터는 사회주의 체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시행되었던 5개년 경제 계획은 공동 생산과 공동 경영을 하였고, 개인 상공업을 없애고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