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고등학교/한국사/일제의 침략

위키배움터
자료 정보
진행 상황: 이 자료는 아직까지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교육 수준: 이 자료는 고등학교 강의 수준의 자료입니다.
자료 형식: 이 자료는 강의형식의 자료입니다.
과목 정보: 이 자료는 한국사 과목의 자료입니다.


러일 전쟁 발발[편집]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됩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 동안 1904년, 일본이 군사적 요청지 사용권을 획득하기 위해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게 됩니다. 그 이후,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제의 고문정치가 시작됩니다. 재정고문에 메가타, 외교 고문에 미국인인 스티븐슨을 임명합니다.

국제적 묵인[편집]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의 인도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게 됩니다. 러일 전쟁 후에는,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하도록 한 포츠머스 조약을 1905년 9월에 맺게 됩니다.

일제의 국권 피탈[편집]

일제는 제2차 한일협약, 흔히 알려져 있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합니다. 고종은 이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지만, 결국 고종의 강제 퇴위 구실이 되고 맙니다. 이후 한일 신협약, 또는 정미7조약을 1907년 체결하였는데, 차관 정치와 한일 신협약의 비밀 각서에 따라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도록 합니다. 이후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합니다. 1910년 결국, 한일 합병 조약을 맺게 됩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당시의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사이에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합니다. 국권을 피탈당하게 되며, 조선 총독부가 설치됩니다.

조선 총독부[편집]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고, 조선 총독이 임명되었습니다. 조선 총독은 일본 국왕에 직속된 사람이었으며, 입법, 사법, 행정권 및 군사권 모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육군 총독만이 임명되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요. 이후 친일파로 구성된 조선 총독부 자문 기구로 중추원을 둡니다. 이는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후 행정을 담당하는 정무총감,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총감 등을 두었고, 경제 수탈 기구로 철도국, 전매국, 조선 은행 등을 두었으며, 지방 통치조직에는 도, 부, 군, 면의 통치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들 자리에는 모두 친일 인사를 등용하였습니다.

통치의 전개[편집]

무단통치기[편집]

헌병경찰 통치기라고도 불리는 1910년대에는 헌병 경찰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헌병이 경찰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즉결 처분권이 있었고 경찰범 처벌 규칙, 조선 태형령 등을 시행하였습니다.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는데, 관리와 교사들에게 칼과 제복을 착용하도록 하였고, 언론, 출사, 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박탈하였습니다.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또, 민족 운동단체를 탄압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105인 사건 조작이 있습니다.

문화통치기[편집]

민족분열통치기라고도 불립니다. 1920년대는 1919년의 3.1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고, 일본의 통치에 국제 여론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보기로 문화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문관 총독을 임명가능하도록 하였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였고, 도평의회, 부면협의회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관 총독은 임명되지 않았으며, 경찰 수와 장비가 도리어 대폭 증가하였고, 고등 경찰제를 실시하였으며, 치안유지법을 실시하여 더욱 민족을 탄압하였습니다. 또한, 언론과 출판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 기사의 삭제, 정간, 폐간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또, 초등교육과 실업교육 위주로 교육을 하여 실제 한국인 취학률은 낮았습니다. 그리고 도평의회 등은 일부 자산가에게만 기회를 주어 자문기관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민족 말살통치[편집]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제 대공황이었으며, 주변에서는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이 일어났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의 수탈을 위하여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황국 신민화 정책을 폈으며, 내선일체일선 동조론을 강조하였습니다.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거나,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를 강요하였고,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일본식 성명을 강요한 창씨개명을 시행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폐간하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