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고등학교/사회(역사/도덕 포함)/한국사(2009 개정)/선사 문화와 여러 나라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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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문화의 전개[편집]

구석기 시대[편집]

  • 약 70만년 전에 시작했다.
  • 주요 유적으로는 평양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 이 시기에는 주먹도끼, 찍개, 긁개, 밀개 등 뗀석기를 사용했다. 구석기 후기에 작고 날카로운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이은 슴베찌르개 등을 제작했다.
  • 주로 동굴,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 등에서 생활했다.
  • 신분제가 아닌 평등한 공동체 사회였다. 채집, 수렵, 어로 등으로 식량을 마련하며, 이동 생활을 했다.
  •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을 통해 사냥감의 번성을 기원했다.

신석기 시대[편집]

  • 기원전 8000년 경에 시작했다.
  • 제주 한경 고산리, 강원 양양 오산리,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황해 봉산 지탑리 등 유적들이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분포해있다.
  • 이 시기에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했다. 또, 음식물의 저장과 조리를 위해 빗살무늬 토기 등의 토기를 만들었다.
  • 뼈바늘과 가락바늘 등을 이용해 옷과 그물을 제작하는 등 원시적 수공업이 발생했다.
  •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움집을 지어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렵과 어로 생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 씨족 간의 족외혼을 통해 부족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 정령을 숭배하는 애니미즘,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이 출현하였다.
  • 조개껍데기 가면이나 치레걸이 등을 제작하였다.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편집]

청동기 시대[편집]

  • 기원전 2000년경~기원전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
  •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무기와 제기를 청동기로 제작했다. 그러나 석기(반달 돌칼), 토기(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한 정복 전쟁의 과정에서 지배자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제사와 정치를 주관하고,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하였다.
  • 지배층의 무덤인 고인돌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예술품으로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이 있는데, 이를 통해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였다.

고조선의 건국과 성장[편집]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에 고조선의 건국 설화가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농경 사회가 형성되었고, 계급이 발생했으며, 제정일치의 지배자(단군 왕검)의 출현 등이 반영되어 있고, 홍익인간의 통치 이념 역시 제시되어 있다.
  • 기원전 5세기 무렵 철기 문화를 수용하였다. 기원전 4~3세기 경 연과 대립하여 연의 공격으로 세력이 위축되었다.
  • 기원전 3세기 경 부왕, 준왕 등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했고,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 진 말기~한 초기에 유이민 무리가 고조선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이 때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정복 활동과 통치 체제 정비가 활발했다.
  • 고조선은 한과 한반도 남부의 진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독점했다.
  • 기원전 108년 한 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하여 한의 군현이 설치되었다.
  • 당시에는 8조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3개 조항이 전해진다. 남아있는 조항들을 통해 고조선은 계급 사회였고,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군현 설치 후 법령이 60개 조로 증가하였다.

철기 문화의 수용[편집]

  • 기원전 5세기 경에 철기 문화가 수용되기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널무덤과 독무덤을 제작하였다.
  • 한반도에는 세형 동검, 잔무늬 거울 등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인데 고조선의 여러지역에서 발굴되는데 이를 비롯하여, 반량전 등 중국 화폐도 일부 출토되고, 붓이 출토되는 것으로 봤을 때 이 시기에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고, 한자의 원류가되는 고대문자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성장[편집]

부여[편집]

  • 만주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세력이 위축되었다가, 연맹 왕국 단계에서 5세기 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사출도를 지배하는 5부족 연맹 왕국이었다. 이로 인해 왕권이 미약했다.
  • 순장, 1책 12법 등의 풍습이 있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소를 죽여 그 굽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고구려[편집]

  • 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건국한 후 국내성으로 이동하였다. 한 군현을 공략하고, 요동에 진출하고, 옥저를 정복했다.
  • 5부족 연맹 국가로써, 제가 회의를 통해 중대 범죄자를 처벌했다.
  • 서옥제, 형사취수제 등의 풍습이 있었으며,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옥저와 동예[편집]

  •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동해안, 동예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했다.
  • 이 둘은 고구려의 압력 등으로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읍군, 삼로가 부족을 지배했다.
  • 옥저는 고구려에 어물과 소금을 공납으로 냈으며 민며느리제, 가족 공동 무덤 등의 풍습이 있었다.
  • 동예는 단궁, 과하마, 반어피가 많이 났고, 족외혼과 책화를 엄격히 지켰다.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여(呂),자형, 철(凸)자형 집터가 남아있다.

삼한[편집]

  • 고조선 유이민과 한반도 남부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성립되었다.
  • 마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삼한 전체를 주도했다. 신지, 읍차 등이 부족을 지배하고, 천군이 소도에서 5월과 10월의 계절제를 주관하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변한 지역은 철을 생산하여 낙랑과 왜에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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